제주국제평화센터 기획초대 박정근, 양동규 2인 전
《결에 머문 숨》
제주국제평화센터 기획전시실
2026. 2. 26 - 4. 26
《결에 머문 숨》
기획의 글_권주희
숨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결을 따라 흐른다. 나무의 나이테가 시간을 품고, 땅의 층위가 계절을 기억하듯, 자연의 표면은 오래 머문 것과 잠시 스쳐 간 것의 차이를 고스란히 간직한다. 《결에 머문 숨》은 박정근, 양동규 작가가 각기 다른 자리에서 감각한 자연의 시간성을통해, 존재가 한 장소와 관계 맺는 방식을 탐구하는 전시다.
이 전시는 자연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대신 자연을 시간과 기억이 중첩되는 장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결’은 단순한 표면의 질감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의 구조이며, ‘숨’은 그 위를 스치고 스며들며 존재를 갱신하는 미세한 운동이다. 결이 응축된 지속이라면, 숨은 생성의 리듬이다. 두 개념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조건으로 삼으며 하나의 장을 이룬다.
양동규의 작업은 오래 머문 시선에서 출발한다. 나무와 돌, 흙의 표면을 응시하며 그는 그 안에 겹겹이 쌓인 시간을 드러낸다. 정지된 풍경처럼 보이지만, 그의 화면은 지속의 밀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 장소와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감각의 축적이다. 자연은 그에게 배경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내는 몸이며, 결은 그 몸에 새겨진 기억의 구조다.
반면 박정근의 작업은 흐름 속에서 형성된다. 바다와 바람, 빛의 흔들림은 슬로우 셔터를 통해 고정되기보다 오히려 생성의 흔적으로 남는다. 그의 이미지는 머무름보다는 이동, 고정보다는 통과의 감각에 가깝다. 한 장소에 완전히 귀속되지 않으면서도, 그 안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리듬을 만든다. 자연은 그에게 정착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관계를 재구성하는 장이다.
이처럼 두 작업은 서로 다른 시간의 위치를 드러낸다. 양동규 작가는 축적을 통해 장소의 깊이를 드러내고, 박정근 작가는 흐름을 통해 장소의 경계를 확장한다. 그러나 이 차이는 위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다. 오래 머문 감각과 새로 스며드는 호흡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이에서 장소는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복수의 시간과 경험이 교차하는 장으로 드러난다.
《결에 머문 숨》은 정주와 이주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장소에 머무는방식과 그 장소를 통과하는 방식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머묾은 고정이 아니며, 이동은 단절이 아니다. 결은 시간을 붙잡고, 숨은 그 위를 흐른다. 응축과 생성은 서로를배제하지 않고, 동일한 공간 안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결국 이 전시는 자연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시간성을 다시 묻는다. 우리는 이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 혹은 얼마나 스며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차이는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 겹쳐진 시간의 층 위에서, 서로 다른 두 숨은 조용히 공기를 나눈다. 자연은 그렇게 단일한 풍경이 아니라, 축적과 이동이 함께 이루는 하나의 미학적 장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 양동규 — 침묵의 결, 시간을 품은 몸
양동규의 작업은 응시에서 시작된다. 흙, 돌, 나무, 마른 풀. 움직임을 멈춘 자연물들은 그의화면 안에서 축적된 시간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건의 시간이 아니라 겹쳐진 시간이다. 그는 자연을 ‘형태’로 소비하지 않는다. 표면의 질감, 균열의 깊이, 색의 밀도를 통해 시간이 만든 구조를 더듬는다. 그의 시선에는 조급함이 없다. 오래 머물며 반복해 바라보고, 사소해보이는 차이를 포착한다.
작가의 화면이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고정성 때문이 아니라 밀도 때문이다. 이 단단함은 폐쇄가 아니라 시간을 받아들인 결과다. 자연은 말이 없지만,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오랜 지속이 만들어낸 깊은 호흡이다.
양동규 작가가 바라보는 나무는 단순히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계절과 빛, 바람을 통과하며 시간을 살아내는 몸이다. 돌 또한 침묵 속에서 존재한다. 설명되지 않기에 지워지지않고, 말하지 않기에 오래 지속된다. 돌의 표면에는 시간이 봉인되어 있고, 그 침묵은 사라진것들의 흔적을 간직한다.
작업은 대상을 해석하기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고 있는 것은 이 섬인지’, 자신의 위치를 되묻는다. 
그의 사진은 나무의 응시와 돌의 침묵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드러낸다.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태도이며, 의미를 규정하기보다 사유의 공간을 열어두는 방식이다.
『사유하는 섬: 보는 나무, 침묵하는 돌』에 대한 작업 노트
길게는 십수 년, 짧게는 몇 해 전부터 바라보아 온 풍경이다. 우연히 마주쳤던 어떤 풍경과 대상은 카메라의 필름이나 메모리카드에만 남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잠재된 의식 속 무언가와 만나 오래도록 머물렀을 것이다. 반복해서 비슷한 이미지를 담아내는 행위는 새로운 대상을 찾으려는 시도라기보다, 이미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어떤 이미지를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담아낸 것은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나는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 수없이 되묻지만, 질문은 언제나 말없는 대상 앞에서 되돌아올 뿐이다.
나무와 돌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해석을 요구하지도, 섣불리 의미를 내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앞에서 나는, 내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며 엉뚱한 곳에서 의미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물을 바라보는 내가 아니라, 사물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와 돌을 품고 있는 자연이, 물로 둘러싸인 이 섬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바라보아 온 나무는 그 자리에 서 있다.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며, 묵묵히 주변을 바라보고 감각한다. 모든 것을 바라보며 제 안에 담아내려 애쓴다. 그 시선은 선택적이거나 배제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함께 품는다.
돌은 침묵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침묵은 돌의 태도이자 돌이 시간을 견뎌온 방식일 것이다. 그 침묵의 의미는 인간이 아닌, 이 섬만이 알고 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워지지 않은 것들, 설명되지 않음으로써 남아 있는 것들이 돌의 표면에 켜켜이 축적되어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피로 물든 돌의 침묵”(김시종, 「아직도 있다면」)일지도 모른다. 돌을 침묵하게 만든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던 나무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나무는 보았고, 돌은 견뎠으며,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섬은 사유해 왔다. 나의 작업은 '어디에서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 시도다. 나는 대상의 의미를 감히 규정할 수 없다. 그저 나무의 시선과 돌의 침묵 사이에 서서, 섬이 사유해 온 시간의 결에 잠시 귀 기울일 뿐이다. 섬의 감각을 느껴보기 위해 오래된 나무에 귀를 대어 보고, 묵묵한 돌에 붙은 이끼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볼 뿐이다. 부디, 이 섬의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