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규 개인전 "터"
BASE
Yang Dong-gyu Solo Exhibition
2021. 7. 16 ~ 8. 5, 포지션 민 제주
전시 전경
‘포지션 민 제주’에서 양동규 작가의 개인전 ‘터’를 선보인다.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개 인전이다. 작가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활동하는 시각예술 작가다. 그동안 다양한 사회적 이슈와 그로 인해 변화되어가는 제주의 본질을 직시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양동규가 보여주는 ‘터’는 ‘태손땅’, ‘고립된 평안’, ‘동시대 스냅’ 등의 작업으로 구성된다. 양동규의 ‘터’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바라보는 섬의 서사를 시각적 이미지로 펼쳐내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청년에서 중년의 나이가 되는 동안 제주의 역사와 현실을 만나면서 기록한 이미지를 현시점에서 새롭게 가공하고 응축시키는 과정을 거쳐 창작된 것이 양동규의 ‘터’다.
‘터’의 이야기는 ‘태손땅’에서 시작된다. ‘태손땅’은 ‘태손땅 못 내린다(태를 사른 땅은 못 버린다).’는 제주 속담에서 따온 말이다(‘태손땅’은 1980년대 초 제주의 마당극 단체인 수눌음에서 창작한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탐라의 섬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불 에 태워 아무도 모르는 땅에 묻었다. 그러므로 섬사람에게 땅은 자기 탯줄을 묻은 시원의 터요, 생명을 품은 본향이며, 삶의 터전으로 지켜가야만 하는 자존의 영역이다.
양동규는 ‘태손땅’에서 <봄>, <빈 땅>, <시조새>, <미여진뱅듸의 하늘>, <XX를 위해 세 운 공로> 등의 작품을 통해 제주 땅의 시간과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 문예비평가 김동현은 양동규의 ‘태손땅’에 대해 “땅의 기억과 땅의 시간을 응시한 결과물이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때로는 희미하게 흔들리는 만장(輓章)이기도 하며 오래전 궤 속에서 숨어 지냈던 누군가가, 떨리는 가슴으로 바라보았던 들판이기도 하다. 땅의 기억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제주 4·3과 마주한다. 인연처럼, 숙명처럼, 매여있는 시간들. 그 땅에서 태어났기에 얽혀버릴 수밖에 없는 굴레.... 그 오랜 시간 앞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침묵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태손땅’에 이어 ‘고립된 평안’으로 들어가면 시골 어느 집 안에서 봤을 법한 이미지와 함 께 눈여겨보지 않았던 제주의 풍경이 펼쳐진다. ‘고립된 평안’은 김시종 시인의 장편 서사시 <니이가타>에서 따왔다. ‘고립된 평안’은 현시점의 이야기다. 대전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을 보여준다. 집 안에서 담아낸 이미지는 4·3생존희생자의 방이다.
작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4·3의 희생자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던 작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4·3희생자의 손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4·3생존희생자의 집에서 만나 수집한 이미지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소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에서 바라본 풍경들은 “할머니가 바라봤던 풍경이면서 4·3을 겪어낸 삶의 풍 경”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에 대해 김동현 비평가는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녹음(綠陰)은 여전하다. 눈이 내린 다랑쉬, 지극히 평범한 들판에 삶과 죽음의 기억들은 어떻게 스며드는 것인가. 오늘의 삶이 평안하다면 어제의 죽음은 무고한가. 삶이 죽음으로 뻗고, 죽음이 삶 으로 스며드는 혼돈이 없다면 기억은 어떻게 시간을 견디는 것인가. 오늘의 평안이 고립으 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행인가, 불행인가. ‘고립된 평안’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우리 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고립된 평안’은 <산전>작품을 지나 ‘동시대 스냅, 2019’로 이어진다. 이곳은 2019년 한 해 동안 한반도 분단의 현장, 오사카에 있는 조선학교, 새로운 미 공군기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오키나와의 헤노코, 대만과 중국의 접경지역으로 1970년대 말까지 중국의 폭격이 멈추지 않았던 ‘금문도’를 돌아보며 기록한 동시대의 단편을 보여주고 있다.
양동규 작품집 《제주시점》의 평론을 쓴 미술평론가 김준기는 작가에 대해 “멀찍이서 넓게 담아내는 풍경 사진들이나 바짝 들이대고 좁게 끌어들이는 현장 사진들 모두 대상을 카메 라 렌즈 속으로 끌어들이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끌어들인 대상을 프린트라는 결과로 뽑아 낼 때의 편집술과 배치술에 따라 ‘독해의 차별성’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의 성향 에 따라서는 끌어들이는 방법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많지만, 양동규의 사진은 입력 이나 출력의 방법론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후, 대상물 들을 어떻게 편집하고 배치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양동규의 경우 사진을 ‘무엇 을 찍어서 어떻게 뽑아내느냐’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까지 관심을 집중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덧붙여 김준기 평론가는 “양동규의 예술은 제주의 땅으로부터 출발하여 4·3의 흔적을 찾아 나선 의제 특정적 풍경과 그 너머 개념미술적인 요소들과 역동성으로 확장해왔으며, 제주시점을 토대로 평화예술로 확장해오고 있다. 양동규의 사진들은 전형적인 풍경사진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먼 ‘의제특정적인 풍경’이다. 그 의제 는 당연히 4·3이라는 항쟁과 학살의 서사이다. 기실 대부분의 제주도를 담은 풍경사진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경이로움, 특이성 등에 포커스를 맞출 때, 4·3이라는 항쟁과 학살의 정치적 서사를 담은 풍경 사진이 청년작가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양동규의 예술은 비슷한 연배의 사진, 영상 작가들에 비해 차별적인 출발 지점을 가지고 있다. 30대 청년 양동규 시절부터 4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예 술의 사회적 실천을 향하여 맹렬히 질주한 행동하는 예술의 길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양동규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제주를 바라보는 시점과 제주가 바라보는 시점에 관한 이 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또 다른 작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하며, 제주 섬이 가지고 있는 자연 너머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에 관람객을 초대한다.

관련기사 링크: 
뉴제주일보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