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7. 10 ~ 7. 28
제주갤러리
서울 인사아트센터 B1
숯과 이끼 그리고 흰 바람
양동규 개인전 <희고 흰 바람>展에 부쳐
김수열 시인
숯
우리는 처음부터 덜 죽었을 뿐이다
이산하의 시 「토리노의 말」 중에서
한라산의 겨울은 깊고 아득하다
낮에 울던 까마귀 울음은 들리지 앉고 어둠이 내려앉자 꺼엉꺼엉
노루가 운다 움막 위로 차고 시원한 것들이 하염없이 내린다
입을 벌려 그것들을 먹는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간다
내일은 해를 볼 수 있을까
속솜 속솜 속솜
둥그렇게 모여 앉은 목 잘린 숟가락들에게 숯이 제 몸을 틀면서 말한다
시린 산바람이 마른 억새로 덮는 시늉을 한 움막 위를 재바르게 지난다
목소리를 낮춘 숟가락들이 점차 사위어 가는 숯에 눈길을 준다
따듯하다
어룽어룽 숟가락의 얼굴에 불그림자 드리운다
아직은 숯의 온기가 남아 있다
숟가락들이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한다
사람들이 살았던,
허둥지둥 허겁지겁 살았던 그때 그 움막터를 다시 찾는다
마른 억새는 온 데 간 데 없고 허물어진 돌담만 듬성듬성 남아 있다
움막 한 구석에 불을 지폈을 부뚜막돌이 보인다
역사를 캐는 골갱이로 부엽토를 긁으니 작고 검은 것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민다
아, 숯이다
한때 뜨거웠던 숯의 흔적이다
작은 움막에 온기를 안겨주던 그때 그 숯의 흔적이다
70여 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차지 않다
불을 갖다 대니 발가니 불꽃이 인다
목 잘린 숟가락을 다시 부를 것 같은
숯이다
이끼
한 샤이엔Cheyenne족 노인은
내게 무언가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찾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빈 월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 중에서
길 없는 길로 들어서 산길을 걷노라면
온통 초록이다
내딛는 걸음걸음도 초록이고
둘러보면 온갖 수목들도 여지없이 초록이다
올려다보면 울울창창 숲으로 가린 하늘도 초록이다
새들도 초록으로 울고 먼 데서 들리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도 초록초록하다
발부리에 차이는 돌부리가
아무렇게나 징게멩게 엉클어진 수목들이
새들이 산짐승들이 초록인 것은
이끼가 있어 그렇다
이끼를 본다는 것은
이끼를 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에 다가서려는 몸짓이다
물에서 뭍으로 생명이 움직일 때 그 시초는 다름 아닌 이끼였다
이끼가 있어 지상에 생명이 있을 수 있었다
이끼를 사랑하는 한 사람을 나는 안다
산길에서 무심히 따라온 이끼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매일매일 물을 주면서 이끼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와 대화를 나누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물론 그도 읽었겠지만 로빈 월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에 나오는 한 구절을 여기 옮긴다
이끼가 숲 공동체를 결합하는 호혜의 패턴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이끼는 필요한 만큼만 적게 갖고 크게 보답한다.
이끼는 존재함으로써 강과 구름의 삶,
나무, 새, 조류, 도롱뇽을 부양하지만,
우리는 존재함으로써 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인간은 설계한 체계는 보답하지 않고 갖기만 하므로
생태계 건강을 지키지 못한다.
벌목은 단기적으로 한 가지 종의 요구는 충족할지 모르지만,
이끼, 알락쇠오리, 연어, 가문비나무의 정당한 요구는 묵살한다.
나는 우리도 가까운 미래에 언젠가 이끼처럼
자제하고 겸손한 삶을 살 용기를 갖게 될 거라고 전망한다.
그날이 와서 우리가 숲에 감사해 하면
숲도 우리에게 감사해 하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P247)
그리고 흰 바람
인간의 존경과
지혜의 화(和)가
빈틈없이 짜 넣어진
역사(歷史)에만
우리들의 길을
열어두자
그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시종 시집 『니이가타』 중에서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멀리 섬이 보인다
아니 산이 보인다
산허리에 흰 구름을 두르고 있다
한라산이다
어머니의 산, 불복不服의 산, 한라산이다
관탈에서 바라본 제주의 모습이다
해로천리 유배길에 한라산이 보이면 희망을 접고 갓을 벗었다는 관탈이다
4·3항쟁 무렵 그 섬에 혼자 머문 이 있었으니,
시인 김시종 선생의 시선으로 본 제주의 모습이다
한라산 너머 아름드리 팽나무 지나
비류직하삼천척은 아닐지라도 바다로 직하하는 폭포가 있다
정방낙화다
소남머리에서 수많은 꽃들이 하염없이 떨어지던 시절에 있었다
떨어진 꽃들은 수습할 틈도 없이 바다로 쓸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남은 유족들은 입던 옷가지 몇 개 빈 관에 넣고 봉분 올려 헛묘를 만들었다
봉분 만드는 것도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정방폭포에 가면 눈물 같은 꽃비가 내린다
바람에 흩날리며 하올하올 내린다
하염없이 내린다
양동규는 혼이 깃든 장소를 안다
동광리 무등이왓, 다랑쉬굴, 속령이골, 북받친밭……
장소의 혼(Genius Loci)을 직감하는 작가다
신칼 대신 카메라를 든 심방이다
그리고 흰 바람을 아는 작가다
전시장 1


01. 관탈전경_150x10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4-2025
02. 서있는 나무 02_90x9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2-2025

A-1. 가던 길_산전_150x10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3-2024
A-2. 무동이왓 01-03_34x5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2-2025

B-1. 백년초_80x12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17-2021
B-2. 덩굴_80x12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17-2021
B-3. 버티어낸_산전_150x10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3-2024

C-1. 정방낙화 01_165x11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1-2025
C-2. 정방낙화 01-06_120x8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1-2025
C-3. 정방전경_34x5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1-2025

D-1. 다랑쉬 마을 02-03_80x12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1
D-2. 누이야 이 바다는_80x12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17-2025
D-3. 격랑_80x12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17-2024

E-1. 숯_1948-2024_01_150x10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E-2. 숯_1948-2024_03-05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E-3. 숯_1948-2024_13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F-1. 숯_1948-2024_06_145x109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F-2. 타는 숯_06_90x6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5
F-3.
F-5. 타는 숯_01_145x109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5
G-1. 타는 숯_02-05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5
G-2. 숯_1948-2024_10-11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G-3. 타는 숯_07-10_30x2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5
G-4. 타는 숯_14_40x6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5
G-5. 이끼_01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H-1. 숯_1948-2024_10-11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H-2. 이끼와 돌_70x7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H-3. 숯과 이끼_03_145x109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H-4. 숯과 이끼_01-02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H-5. 이끼_04-06_30x2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I-1. 남겨진 사물_01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_2022-2025
I-2. 남겨진 사물_02-13_15x1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_2022-2025
전시장 2

K-1. 타는 숯_08-10_30x2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5
K-2. 숯_1948-2024_10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
K-3. 숨은 돌_01_90x6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5
K-4. 숨은 돌_02-07_34x5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3-2025
K-5. 검은 돌_01-06_34x5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1-2025
L-1. 유민의 바다_01_60x9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19-2024
L-2. 진달래로 타오르는_Video, Stero_22분 28초_2022
L-3. 흰 바람_Video, Stero_22분 28초_2025
L-2. 희고 흰_Video, Stero_22분 28초_2025
M-1. 빛과 숨_165x110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5-2025
N-1. 고립된 평안_가변크기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18-2021
N-3. 유민의 바다_02_40x6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19-2024
N-4. 시조새_01-02_70x47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16-2021
N-5. 스며든 빛_01-02_60x4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4-2025
N-9. 설 빛_01-03_50x34_Archival Pigment Print on Hanji_2023-2025
N-3. 봉인된 빛 01_90x6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2-2024
N-4. 봉인된 빛 03, 08_90x60_Archival Pigment Print on Fine Art Paper_2024







[작가노트]
제주시점
《희고 흰 바람》
양동규
숯과 이끼
산에 남아 있는 흔적을 찾아 걷고 있었다. 꽤 길게 자란 조릿대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켰을 소나무 군락이 보였다. 앞서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나는 알지 못하는 일을, 그들은 알고 있다. 직접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경험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많은 시간을 산에서 보내며 흔적을 찾아다닌 이들이다. 전해 들은 이야기는 그들의 몸에 체화된 감각 기관을 거쳐 방향을 이끌었다.
몇 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예상되는 지점의 수풀을 헤치던 중, 무언가를 발견했다. 조릿대를 살짝 걷어내자 어렴풋이 사각형 혹은 타원형의 돌담이 드러났다. 돌담에 둘러싸인 중앙에는 두 개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그 사이에는 오래도록 쌓여 있던 낙엽이 썩거나 썩어가고 있었다. 살며시 낙엽을 걷어내자 새까만 흙이 드러났다.
제주의 흙은 까맣다. 제주의 돌도 까맣다. 그래서 처음엔 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숯이라고 했다. 경험 많은 연구원은 그곳에 숯이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이 머물던 터의 중앙엔 두 개의 돌멩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숯이 있죠.”
그동안 숲을 조사하며 알게 된 사실이라고 했다. 나는 처음 보았다. 산속 깊은 곳, 수십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그곳에 남아 있던 것은 숯이었다. 깊고 깊은 심연 속의, 검은 숯.
나는 숯을 집어 들었다. 가벼웠다. 놀랐다. 무게의 감각이 예상을 벗어났다. 그리고, 따뜻했다. 두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가벼운 무게의 까만 잔여물은 따뜻했다. 예상치 못한 채 마주한 사물의 무게와 질감은 낯선 거리감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뛴다. 숯은 뜨겁다. 70여 년 전, 그것은 정말 뜨거웠을 것이다. 추위를 견뎌낼 온기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 숯이었을지도 모른다. 까만 잔여물은 세월을 훌쩍 넘긴 지금 이 순간 나의 손끝에 닿을 때까지 온기를 남겨 두고 있었다. (2023)
그것은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의식에 등록되지 않고 느껴지는 어떤 것”(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에서 비롯된 미시적 감각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결국 사건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의 “의식에 등록되지 않고 느껴지는 어떤 것”(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에서 비롯된 미시적 감각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결국 사건이 되었다.
다시 산을 찾았다. 계절은 바뀌고 있었다. 주말마다 무언가를 찾아 숲을 떠도는 그들에게 산은 하나의 리추얼(ritual) 공간이었다. 감정–기억–정체성을 잇는 그들은, 일상과는 다른 시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매주 반복되는 하루는 점차 어떤 의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동행하는 나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계절이 바뀌면 감각도 바뀐다. 드러나는 것과 숨어드는 것은 지극히 내 감각에 따라 달라진다. 이미 거기에 있던 것, 아직도 있는 것인데, 나의 감각만이 뒤늦게 그것을 지각하게 된다. 지각된 감각은 결국 의식되지 못한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또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사실 알 길이 없다. 다만, 끊임없이 바라보며 사유할 뿐이다.
이끼와 돌
이끼에 시선이 머문 시점은, 눈이 소복이 쌓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발길 닿는 곳마다 무수히 밟히고 걸린 것이 이끼였다. 계속 보고, 만지고, 스치던 이끼는 한겨울의 흰 밭 위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흰 눈과 대비되는 초록빛 이끼는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이끼와 마주한다. 다가가 손을 얹어본다. 온기가 느껴진다. 어떤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와, 사그라지기 전 잠시 전해진 듯한 온기였다. 어디였을까. 그 심연의 끝은 어디로 이어져 있었던 걸까. 바다의 한숨이 바람이 되어 닿은 곳이었을까.
그 온기는 이끼 위에 쌓인 눈마저 녹이고 있었다.
다시 봄이 오고, 모든 생명에 숨결이 더해져 부풀기 시작할 즈음 이끼 채집에 나섰다. 앞선 사람이, 더 앞선 사람이 머물렀을 ‘터’를 발견하고 금속탐지기를 돌려 70여 년 전의 흔적을 찾을 때, 나는 그곳에 자라고 있던 이끼를 조금 뜯어 준비해 간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았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집으로 돌아와 이끼를 물에 담갔다가 다시 준비해 둔 굵은 모래 위로 옮겨 놓았다. 불안했다. 버틴다는 것은 늘 불안한 일이다. 그런데 이끼는 나의 불안을 안다. 매일, 잠깐씩 눈을 맞췄다. 때로는 아내와 아이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어떤 이끼는 이미 흙이 되어갔다. 어떤 이끼는 세상 처음 같은 연둣빛을 품으며 다시 일어섰다.
“이끼와 바위는 아득한 옛날부터 대화를 했고 그 대화는 분명 시였다. 빛과 그림자 그리고 대륙의 이동을 노래한 시다. 그것은 ‘거대함과 미세함, 과거와 현재, 부드러움과 강함, 고요함과 활기, 음과 양이 접촉하는 바위 위 이끼의 변증법’이었다. 그곳에서는 물질과 영혼이 공존했다.” (로빈 월 키머러, 『이끼와 함께』)
희고 흰
‘송령이골 해원상생굿’ 연출을 맡았다. ‘한라산 아미봉 해원상생굿’에 이어 두 번째 연출이다. 이번에도 이름 없는 영혼들을 위한 위무(慰撫)의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름은 있다. 지워졌거나, 가려져 있을 뿐이다. 송령이골은 다른 4·3 유적지들과는 다르다. 아직 유해가 땅속에 남아 있다. 과거 학살의 현장이나 피난지에서 치러졌던 해원상생굿과는 다른 방식으로 준비해야 했다. 유해가 발밑에 있다. 정확히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늠할 뿐이다.
무엇일까. 아직 잠들어 있는 그들과, 그들을 밟고 서 있는 우리를 연결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문득 김지하 시인의 ‘흰 그늘’이 떠올랐다. 해원상생굿을 처음 시작했던 선배 예술가의 기획 의도에서 이 표현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2002년, 『다랑쉬굴 발굴 10주년 기념 현장 위령 해원상생굿』. 그 부제가 바로 「살아남은 자들의 흰 그늘」이었다.
‘흰 그늘’을 떠올리며 기억난 소설이 있다. 한강의 『흰』이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 수의.” 흰 것들에 대한 목록. 그리고 해원상생굿 현장에서 자주 사용되던 하얀 천. 기저귀를 만들던 천이기도 했다. 흰 것은 언제나 해원상생굿판에 있었다.
나는 송령이골의 소나무를 흰 천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희고, 또 희게 만들고 싶었다. 흰 종이로 영혼기를 만들고, 흰 천으로 만장을 세우고, 흰 천으로 나무까마귀를 매달았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순간 내게는 오직 ‘흰 것’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꽁꽁 싸매고, 매달고, 잇고자 했다.
흰 것이 땅속 깊이 뿌리 뻗은 나무와 나무를, 나무와 바람을, 그리고 그때의 사람과 지금의 우리를 이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이른 아침, 해원상생굿은 시작되었다. 바람이 불었다. 만장 하나가 하늘 끝에 닿기 위해 애쓰듯 뒤틀리며 펄럭였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흰 안개비가 내렸다.
슬픔인들 지쳐 끝내는 희어진다.
그럼에도 서성이는 슬픔을 응시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된 거리의 흰 새벽과 마주하자.
_김시종 「희미해지는 날들」 중에서
흰 바람
바람은 끝없는 상喪의 사제다.
계절을 불러내는 바람이 바람 속을 휘몰아치고 있으니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어느 계절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단지 바람이 가로질러 가는
공허한 틈새를 느낄 뿐이다.
(…)
바람은
몰아치는 바람의 틈새에서 비명을 지른다.
_김시종 「바람」 중에서
바람 타는 섬에 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틈새에서 불어온다. 틈새기에서 불어온 바람은 귓가를 스치며 고함을 지른다.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 “바람은 바다의 깊은 한숨으로부터 새어 나온다.” 김시종 시인이 전해준 바람의 이야기다. 바람 부는 날, 바람을 찾아 나선 날은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우는 날이다. 한라산 아미봉에서, 애월리 절벽에서, 잃어버린 다랑쉬 마을에서 바람을 맞는다. 굵은 빗줄기가 온몸을 적시고, 무겁게 응축된 눈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섬을 몰아치는 바람은 무뎌진 감각을 깨운다. 알아듣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알아내려 해도 알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듣기 위해 한 걸음 더 내딛는다. 그리고 이내, 잠잠해지던 바람은 소리 없이 헐레이션 너머로 사라진다.
어둠이 내릴 시간이다. 몇 해를 곁에 두고 지켜보던 숯을 다시 집어든다. 열을 가하자 숯은 다시 빛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빛은 오래가지 않는다. 지켜온 시간이 길어서였을까. 숯은 어렵게 열기를 품은 빛이 되었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좀 더 밝게 빛나는 숯을 눈에 담고 싶어 바람을 더했지만, 오히려 바람 때문에 숯은 더 빨리 재가 되어 흩어졌다. 숯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바람이 던져올린 허공의 잔여물뿐이다.
그때의 빛을, 오늘 본다. 같은 빛이었으리라 믿으며 눈에 담는다. 나무가 처음 열기를 품어 빛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곁에 모여들었을 것이다. 어둠을 들어 올린 그 빛은 애써 감춰야 했던 빛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빛이 전해준 온기에 사람들은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작은 숯의 온기를 느끼며 어떤 꿈을 꾸었을까. 나는 그 꿈을 이해할 수 있을까. 다시 비춰낸 빛은 오늘의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줄까. 이어진 빛을 보며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빛은 보인다. 그러나 온기는 느낄 수 없다. 상상만 할 뿐.
철학자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에서
“사물은 땅의 질서를 담은 암호”라고 했다.
‘숯과 이끼, 나무와 바람은 기억을 담은 암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