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1.
전시장 입구에 선 순간부터, 관객은 양동규가 설계한 시노그라피적 장치 안으로 편입된다. 시계방향으로 안내된 동선은 단순한 이동 경로라기보다, 관객을 제주라는 풍경/환경 속에 점진적으로 몰입시키는 구조에 가깝다. 카메라의 렌즈를 당기듯 관객을 인도하는 흐름은 섬의 바깥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시작해 섬의 내부 세계, 그러니까 숲, 나무, 폭포의 포말을 지나, 숯의 지층과 이끼의 싱그러움으로 이동한다. 벽면을 활용한 방식, 동일한 피사체의 변주와 반복 배치, 포커스/아웃포커스의 교차, 사진의 다양한 스케일이 관람의 리듬을 만든다.
섬의 바깥에서 내부로, 풍경에서 물질로 집중해 들어가도록 하는 전시구성을 ‘줌인(Zoom in)’이라고 불러 본다면, 이는 단순한 시각적 확대가 아니라, 거리 두는 시선에서 내재하는 감각으로 이동시키는 인식적 전환이다. 관객은 이제 전시라는 장치를 따라 걸으면서, 거대하고 복합적인 풍경/환경이 어떻게 미시적 물질들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 목격한다.
작가는 관객을 걷게 만들고, 시선의 거리를 조절하게 만든다. 점진적으로 시각적 밀도를 높여갈 수 있는 체험의 장치로 구성된 전시는 이미지의 평면성에서 벗어나 설치감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작가는 관객이 이미지를 보는 것을 넘어서, 그 이면에 감춰진 다층적 시간을 감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결과 전시장은 공간과 시간, 기억과 감각이 교차하는 복합적 장이 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제주시점, 희고 흰 바람’이다. 작가가 역사의 희생자를 향한 애도와 위무의 마음을 담아 선택한 ‘희고 흰 바람’은 전시장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의 흐름과 그 흐름이 불러오는 기척을 암시하며 전시장 전체를 감싸는 공기를 은유한다. 관객은 희고 흰 바람 속에서 관람의 속도를 조절하고 작품과의 거리 감각을 조율한다. ‘희고 흰’은 어떤 표식보다 여리지만, 그래서 오히려 확실한 감각적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바람’은 보행의 호흡을 바꾸고, 시선의 초점을 움직이고, 시간의 속도감을 변주하는 뉘앙스를 만든다. 이 전시에서 ‘바람’은 추모의 직접화가 아닌, 체험의 매질로 가동된다. 애도의 정동은 이름 없이 공기처럼 스며들며, 시노그라피적 장치를 효과적으로 살려 관객의 감각적 경험을 돕는다. ‘희고 흰 바람’은 특정한 호명을 피한 채, 남겨진 자와 떠난 존재 사이에 스며드는 위무의 기류를 가리킨다. 감각을 통해 맺어지는 미세한 연대의 공기가 이곳에 흐른다.
2.
‘줌인’의 시선은 사물성과 대면한다. 제주의 거대 서사는 숯, 이끼, 나무, 돌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표면에 집요하게 머무는 작가의 시선이 포착한 이미지 위에서 숨쉬지만, 조급하게 발화되지 않는다. 그가 들여다보는 물질들의 무심한 지속력이, 제주와 4.3의 의미에 애타게 매달리지 않더라고 결국은 그 메시지에 닿을 수밖에 없는 강력한 길잡이가 된다.
여기서 표면의 유비가 중요해진다. 숯의 검은 피부는 현무암으로 상징되는 제주의 땅이 가진 표면과 유사성을 보인다. 희고 흰 공간 위로 크게 확대한 숯덩어리의 표면은, 땅의 역사를 응축한 듯 시간의 결로 차 있다. 화산섬의 지질학적 시간과 숯이 경험한 탄화의 시간이 서로 다른 계열임을 인정하더라도, 표면의 문법은 두 시간을 접속한다. 붉게 달아오른 숯의 이미지는 탄화가 발광으로 치환되는 임계의 순간을 붙들며, 열의 잔흔과 시간의 압축을 동시에 드러낸다.
한편 폭포의 이미지에서는 연속적 물줄기가 아니라 포말, 물방울의 분산이 포착된다. 폭포의 물방울은 입자처럼 흩어지고, 물이라는 물성의 상식과 어긋난 채 건조하게 부서지는 촉감을 암시한다. 이 건조함은 카메라의 포착이 만든 역설적 지각이다. ‘수분’의 기호를 덜어내고 미세한 입자가 두드러진 표면은 감각의 범주를 전복하면서 물의 현존을 다른 방식으로 체감하게 한다.
이끼는 땅 위를 덮지만 지우지 않는다. 땅의 복원이란 삭제가 아니라 보존을 통한 지속임을 전한다. 죽음 위에 자라는 생명은 죽음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자연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그렇다. 숯에서 압축된 과거를, 나무에서 생장하는 현재를 볼 수 있다면, 이끼는 복원하는 미래를 암시할 수 있겠다. 그 사이에서 폭포의 물방울은 불연속의 찰나라고 하면 될까. 하나의 막처럼, 그러나 의지가 있다면 통과할 수 있는 막처럼 펼쳐진 폭포수는 시간을 가르고 공간을 가르며, 눈앞에 보이지 않는 폭포 너머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사진의 스케일은 피사체를 대하는 관람자의 관습적 시점을 흔든다. 이미지와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조정하며 사진에 집중하던 관객은 어느 순간, 제주가 바라보는 세상을 알아차린다. 관객이 스스로 자신의 감각과 움직임을 통해 제주가 바라보는 시점을 경험할 때, 그 자신에게도 ‘제주를 보는 복합적인 시점’이 생성된다. 관람의 과정 속, 응시의 대상과 주체가 반복적으로 교체되는 동안, 절대적인 단 하나의 고정된 시점은 무의미하다.
의미 해석을 유예하고 감각의 밀도를 높이는 여러 장치를 통해 작가는 관객을 물질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숯의 섬세한 균열, 이끼의 촉촉하고 싱그러운 질감, 건조하게 부서지는 물방울의 기이한 촉감은 해석 이전의 감각, 의미 이전의 현존으로 관객에게 스며든다. 그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 충만함의 세계는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 피부로 느끼는 경험에 가깝다.
출구에 걸린 숟가락은 전시의 태도를 압축한다. 초상사진처럼 걸린 숟가락 사진은 위기의 시간에도 지난하게 이어지던 일상의 구조 –먹고 살고 버티는 행위-를 지시한다. 이 이미지는 지표가 되어 공동체의 생존을 마주본다. 전시가 애도의 정동을 직접 명명하지 않고도 공기처럼 전달하는 방식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
작가가 말하는 혼을 위로하고 잊힌 흔적을 찾는 여정은, 사진이 도달하고 있는 미학적 성취를 통해 우회적으로 감지된다. 그의 작업이 늘 그래왔듯, 이미지들은 4.3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의 표면에 남은 부재의 흔적을 통해 현존을 감지하게 한다. 이 전시의 사진들은 목격의 과장 없이도, 표면을 통해 시간과 사건을 드러내는 감각을 만든다.
동선의 설계는 이러한 감각을 구체화한다. 동일 피사체의 반복 배치는 리듬을, 포커스/아웃포커스의 교차는 맥박을 만든다. 실물과 사진 사이에 조율된 스케일은 관객의 신체를 표면의 시간에 붙잡아둔다. 관람은 속도를 높이는 대신 머묾을 배운다. 걸음과 호흡은 느려지고, 시선은 안과 밖을 이동한다. 작가가 선택한 ‘제주시점’이라는 단어는 주체의 자리를 고정하지 않고, 인간의 시선을 비인간의 관점으로 조정하며, 다중의 시점이 잠정적으로 성립하는 장을 연다. 전시 안에서 대상을 직시하는 눈의 위치와 더불어, 대상을 목격하는 순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작동하는 ‘시점’은 공간 인식과 시간 경험을 함께 매개하는 개념이 된다.
3.
땅은 기억한다기보다 기록하는/되는 존재에 가깝다. 숯도, 이끼도, 돌도 사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허약한 기억력을 가진 인간이 땅과 사물에 기억을 투영하고, 땅에 의존하여 기억의 단초를 캐내고 역사를 읽으려 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보존된 기록은, 인간이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갖는다. 불에 타도 남는 숯처럼, 죽어도 자라는 이끼처럼, 흩어져도 다시 모이는 물처럼 땅에는 흔적이 새겨진다.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드는 살아있는 장소 제주는, 기억이 뿌리내린 물질적 지층이 된다. 양동규가 포착한 제주는 역사를 위한 수동적 배경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과 죽음, 바람과 물, 인간의 삶과 기억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짜인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과 같다. 작가의 카메라는 그물망의 한 매듭 -숯, 이끼, 돌, 나무, 폭포-으로 그 구조에 접근한다.
역사적 사건은 직접 재현이 아닌 징후로 호출되고, ‘혼’은 명명되지 않은 채 공기의 층위로 깔린다. 관객은 반복과 차이, 선명함과 흐림, 수분기와 건조함 사이를 왕복하며 표면을 통해 시간에 접근하는 법을 배운다. 그 배움은 관념이 아니라 보행과 응시, 호흡과 체온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제주를 ‘본다’기보다, 그곳의 공기 속에서 얽힌 시간들을 산다.
그의 사진은 역사를 말하기 위해 감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품음으로써, 역사에 도달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이 길위에서 관객은 제주 아래 잠복한 시간의 층위들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통과한다. 전시장에서 사진들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신체를 통과하면 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