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그려낸 
오늘의 응시
- 양동규 '태 손 땅'에 부쳐
김동현_문학평론가
기억이 사라지면 땅도 사라진다. 땅의 물리(物理)는 단순하지 않다. 땅은 단순히 공간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제와 오늘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부피가 함께 하고 있다. 땅의 기억은 강렬하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혈연이다. 지독하리만치 떨쳐버릴 수 없는 이어짐이다. 땅의 기억을 알았던 제주 사람들에게 ‘태 사른 땅’은 ‘나’라는 인간의 시작이자 총체였다. 
양동규의 ‘태 ᄉᆞᆫ 땅’은 땅의 기억과 땅의 시간을 응시한 결과물이다.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때로는 희미하게 흔들리는 만장(輓章)이기도 하며 오래 전 궤 속에서 숨어 지냈던 누군가가, 떨리는 가슴으로 바라보았던 들판이기도 하다. 땅의 기억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제주 4·3과 마주한다. 인연처럼, 숙명처럼, 매어있는 시간들. 그 땅에서 태어났기에 얽혀버릴 수밖에 없는 굴레…. 그 오랜 시간 앞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침묵이다. 
‘빈 땅’은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4·3 유해 발굴 현장을 보여준다. 그것은 숱한 유골들이 쏟아져 나왔던 1차 발굴 현장이 아니다. 실패한 발굴의 현장, 양동규의 표현대로 ‘비어 있는 땅’이다. 그것은 기록에서 배제된 장소이며, 기록되지 않는 기억이다. 비어 있는 기억,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다. 그렇게 텅 비어 있는 침묵의 땅 위로 비행기는 마치 시조새처럼 하늘을 날고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양동규의 ‘태 ᄉᆞᆫ 땅’ 연작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은 선택과 구분의 시선이다. 기록되는 것과 기록되지 않는 것들을 나누고, 기록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들이다. 그렇기에 기록되는 것들은 기록되지 않은 잉여들의 여집합이다. 살아있는 자들의 기대와 달리 텅 빈 몸을 보여주는 땅은 우리들의 기대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빈 땅’이라는 명명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나 유효한 것이다. 땅은 태초부터 충만한 존재이니 그것을 텅 비어 있다고 판단하는 것조차 살아남은 자들의 시선일 뿐이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이란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 기억하는 것보다 기억되지 않는 것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기억 바깥에 존재하는 기억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여, 우리의 기억이란 텅 빈 대지에서 간신히 건져낸 시간들이다. 
양동규는 기억할 대상이 없음을 보여주면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기억의 역설’이자, ‘침묵의 역설’이다. 그렇게 양동규는 침묵을 재정의한다. 그에게 있어 침묵은 말하지 않겠다는 망각의 공조가 아니다. 여전히 말을 할 수 없게 하는 강요이다. 모두가 말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 식상한 표현처럼 ‘대명천지 개명한 세상’에서 제주 4·3을 이야기할 수 있는 오늘을 양동규는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오늘에 존재하는 침묵의 강요와 동조를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태 ᄉᆞᆫ 땅’ 연작에서 볼 수 있는 피사체들은 제주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숲의 모습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선택한 대상을 자세히 보다보면 마치 심연처럼 흐르는 시간의 언어를 만날 수 있다. 이덕구 산전의 때죽나무, 궤의 안과 바깥에서 바라본 제주 들판은 풍경의 정물 너머 섬 땅의 시간들을 우리의 시선 앞으로 데리고 온다. 그것은 무자 기축의 어느 날, 그 들판, 그 동굴에서, 바라보았음직한, 풍경들이며, 그 풍경을 시선에 담았던,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그렇게 그의 작품 안에서 기억은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기억과 침묵의 역설을 이야기하는 그의 작업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김시종 시인과의 만남이다. 이번 전시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언어를 그는 김시종에게서 찾고 있다. 제주 4·3 당시 남로당원이었던 김시종은 그의 고백처럼 오랫동안 제주 4·3에 대해 침묵해왔다. 그것을 김시종은 자신의 비겁 때문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김시종은 니이기타와 광주시편 연작 등을 통해 꾸준히 재일이라는 실존을 노래해왔다. 4·3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았지만 김시종의 작품을 배태한 실존이 제주 4·3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시종은 내 눈앞에서는 죽지말라는 부친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면서 관탈섬에서 사흘을 숨어 지냈다가 일본으로 밀항했다. 김시종에게 재일은 4·3의 지속이자, 또 다른 반복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시종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었다. 침묵의 여전한 강요를 드러내는 증언이자, 침묵으로 침묵을 부수는 저항이었다. 
일본어로 일본어에 대한 복수를 해왔다는 김시종의 고백이야말로 가장 격렬한 저항의 언어가 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침묵과 기억의 역설을 말하는 양동규의 작업이 김시종을 소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김시종은 ‘침묵의 역설’을 살아있음으로 증언해 온 장본인이었다. 
땅의 기억에서 출발한 그의 시선은 ‘고립된 평안’에서 더 구체화된다. 시골 어느 집에 가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집안의 모습들에서 양동규는 제주의 시간을 읽어낸다. ‘비국민’이었고, ‘비국민’이어야만 했던 그해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무궁화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벽장 귀퉁이에 박힌 낡은 옷걸이와 좁은 방안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들은 과연 어떤 시간을 기억하는 것일까. 파도는 쉼 없고, 꽃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피고 진다. 살아남은 자들과 죽어 버린 사람들, 죽어서 잊힌 사람들과 살아서 잊어버린 사람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녹음(綠陰)은 여전하다. 눈이 내린 다랑쉬, 지극히 평범한 들판에 삶과 죽음의 기억들은 어떻게 스며드는 것인가. 오늘의 삶이 평안하다면 어제의 죽음은 무고한가. 삶이 죽음으로 뻗고, 죽음이 삶으로 스며드는 혼돈이 없다면 기억은 어떻게 시간을 견디는 것인가. 오늘의 평안이 고립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행인가, 불행인가. ‘고립된 평안’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다.
불편하지만 마땅한 질문을 견뎌내면 우리는 섬들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태손 땅’에서 시작한 역설의 시선은 ‘섬, 섬, 섬-동시대 스냅’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동시성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오키나와와 금문도를 포착한 ‘스냅’들은 속물적인 호기심 혹은 낯선 이국에 대한 관심을 철저히 배제한다. 하늘을 방사형으로 갈라놓은 철조망은 한국의 역사인 동시에 오키나와, 금문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아시아가 겪어야 했던 냉전과 탈냉전의 시간이자, ‘침묵의 역설’을 동시에 관통해야만 했던 섬들의 역사이다. 기지 건설을 지켜보는 소나무는 동아시아의 대지가 마주해야 했던 역사의 흔적이다. 그렇게 동아시아의 심연에서 섬들의 뿌리가 얽혀져 있을 것이다. 제주와 오키나와, 금문도는 섬과 섬들 사이를 흐르는 바다에서 뻗어간 나뭇가지들이다. ‘고립된 평안’에서 진짜 평안이 무엇인지 물었던 것처럼 양동규는 섬의 역사가 과연 단독의 시간이었는지를 묻는다. 
이번 전시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은 ‘돌의 침묵’이다. 돌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들이 들린다. 웅얼거림이기도 하고, 낯선 이국의 언어이기도 하고, 소음이기도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작가는 그것을 김시종 시인의 목소리를 비롯해 생존 희생자들의 증언을 겹쳐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리가 소리 위에 쌓이고 자음이 모음 위에서 포개져 만들어내는 언어들. 그것은 말이자, 말이 아니며, 소리이자 소리가 아니다. 신산한 시간을 견뎌온 한 인간의 증언이자, 증언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음성들이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다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해 침묵할 수 있다. 침묵과 증언은 소리의 외부이자 내부이며, 말의 앞면과 뒷면이다. 침묵의 여집합과 증언의 여집합. 그리고 여전히 말해지지 않는 말들까지. ‘돌의 침묵’은 언어의 옷을 입지 못한 말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그래서 우리가 만나야 할 것들은 언어가 아니라, 말의 외양을 얻지 못한, 침묵의 외부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르조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는 프리모 레비에 주목하면서 증언의 구조를 문제 삼았다. 죽은 자들은 증언할 수 없고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들은 당대의 사실들을 초과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지적처럼 시간은 살아남은 자들의 현실을 초월하며, 기억은 오늘의 몸에 다 담을 수 없다. 말이 아니라 침묵을, 언어가 아니라 언어가 되기 이전의 소리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양동규의 작업이 ‘침묵의 역설’을 통해 말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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